1996. 12. 『조선유학의 학파들』, 한길사


녹문학파(鹿門學派)의 철학 사상


김   현*1)

1. 녹문학파(鹿門學派)의 정의

2. 임성주(任聖周)의 사상

3. 임윤지당(任允摯堂)의 사상

4. 임정주(任靖周)의 사상

5. 녹문학파(鹿門學派)의 철학적 성격


  1. 녹문학파(鹿門學派)의 정의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1711-1788)는 장지연(張志淵)의 <<조선유교연원(鮮儒敎淵源)>>에 소개된 이후, 현상윤(玄相允)이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에서 그를 조선 성리학의 육대가(六大家)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들었고, 이병도(李丙燾)는 <<한국유학사(韓國儒學史)>>에서 그의 철학의 연원을 밝히는 등 조선유학사 연구의 초기부터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아 왔다.  1970년대 이후에는 배종호(裵宗鎬), 유명종(劉明鍾) 등이 녹문을 연구하여 그의 철학이 조선후기의 인물성동이론쟁(人物性同異論爭)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또 명(明)의 나흠순(羅欽順, 整庵 1465-1547)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하는 점을 밝혔다. 그후 정인재(鄭仁在), 김낙필(金洛必), 야마우치(山內弘一), 허남진(許南進), 김현(金炫) 등이 녹문의 철학을 심도 있게 연구한 논문들을 발표하여 그의 철학은 이제 그 내용과 성격을 충분히 드러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녹문 철학의 연구에 있어서 아직까지 미진한 것으로 남는 부분은 그의 사상이 당대 또는 후대의 학자들에게 미친 영향에 관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녹문의 철학은 탁월한 문제의식과 참신한 이론 제시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다른 학자들에 의해 더욱 발전적으로 계승된 사례를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의 철학이 그 시대의 일반적인 학문 조류에 비추어 볼 때 다소 이질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수적인 학연에 매여 있던 당대의 학자들이 녹문의 이론을 수용하기 어려웠던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녹문의 철학을 이은 학인들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친동생인 임윤지당(任允摯堂, 1721-1793)과 임정주(任靖周, 雲湖 1727-1796)가 남긴  저작 속에는 녹문이 지향하였던 철학 사상이 보다 객관화된 형태로 정리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의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세 사람의 학자가 일정한 학문적 목표를 가지고 상호 보완적인 이론을 전개했다고 하면 그들의 학문 전체를 한 학파의 사상으로 묶어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녹문(鹿門)․윤지당(允摯堂)․운호(雲湖), 이 세 사람의 학문도 그러한 방식으로 총체적으로 접근해 보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 세 사람의 관계는 순수하게 학술적 동기에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며 동기간이라고 하는 혈연적 관계가 우선하므로 일반적 의미의 ‘학파’로 간주하기에는 다소 무리한 면이 없지 한다. 윤지당과 운호가 녹문의 학문을 이어간 데에는 녹문이 그들의 친형이었기 때문에 비판적이기보다는 긍정적으로 대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지당과 운호의 학문 업적을 살펴보면 그들이 녹문의 학문을 무조건적으로 묵수한 것은 아니었음을 발견한 수 있다. 그들은 녹문 철학의 큰 줄거리를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여 자기 이론화하였는데, 그 가운데 그들 철학의 근본적인 지향점을 더욱 명시적으로 드러낸 면도 있으며, 또 녹문의 철학에서 지나치게 돌출하였던 요소들을 순화하여 당대의 일반적인 성리학설과의 조화를 꾀한 면도 발견된다. 이러한 점을 주목하게 되면 녹문․윤지당․운호 세 사람의 학자는 하나의 철학 이론을 완성짓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인 한 학파의 구성원으로 간주한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생각된다. 필자는 그들 세 사람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어 잠정적으로 ‘녹문학파(鹿門學派)’라고 지칭하고자 한다. 이 글은 녹문학파 학자들이 전개한 철학 이론을 소개하고 그들 철학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지향점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임성주(任聖周)의 철학 사상


  1) 생애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는) 숙종(肅宗) 37년(1711년) 충청도(忠淸道) 청풍(淸風)2)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풍천(豊川). 아버지 노은(老隱) 임적(任適(1685-1728)과 어머니 尹氏는 녹문을 비롯하여 모두 오남이녀를 낳았는데, 녹문은 그 가운데 두 번째 아들이었다.

  녹문은 어렸을 때부터 입신에 뜻을 두기보다는 유학의 본령인 성인이 되기 위한 공부에 마음을 쏟았으며, 특히 16세 때 율곡의 글을 읽고서는 ‘천인합일(天人合一)’ 경지를 성찰하였다고 한다.3) 녹문은 17세 때(1728년) 부친이 돌아가시자 가족과 함께 청주(淸州)로 내려 와서 학문 연구에 몰입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즈음 서울 근교에 거주하던 도암(陶庵) 이재(李縡)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적인 담은 서신을 교환하는 등의 방법으로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였다.4)

  녹문은 22세 때에 사마시(司馬試, 生進科)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경학을 하는 선비로서 명성을 얻어 39세가 때에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세마(洗馬, 정9품) 직을 제수받게 되었고 곧이어 시직(侍直, 정8품)으로 승진하였다. 42세 때에 종부시(宗簿寺)5)로 자리를 옮겨 주부(主簿, 종6품)의 직을 맡았다가 그 이듬해에는 임실현감(任實縣監)6)으로 부임하여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행정업무와 교화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형과 동생이 연이어 죽자 낙향할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그 47세 때(1748) 충청도 공주 근방의 녹문에 은거하였다.

  녹문은 ‘녹문선생(鹿門先生)’이라는 그의 호의 근거가 된 이곳에서 학문에 침잠하였다.  그의 독특한 성리설을 집약한 <녹려잡식(鹿廬雜識)>이 저술된 시기도 바로 이곳에 은거하던 때였다. 그러다가 1762년, 그의 나이 51세 때, 장헌세자(莊獻世子)가 비명에 돌아가고 정조(正祖)가 동궁에 오르게 되면서 녹문은 다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위솔(衛率, 종6품) 직에 부름을 받게 된다. 녹문은 이 자리에 약 5년간 있다가 태창(太倉)7)의 주부(主簿, 종6품)로 자리를 옮겼고, 58세 때  익위사(翊衛司) 위솔(衛率)에 복직하였으며, 이듬해에는 (1770, 59세) 사옹원(司饔阮)8)의 주부(主簿) 직을 맡았다. 그 다음 해에 녹문은 두번째 외직 임지였던 양근군(楊根君)9)에 부임하였는데, 임실현(任實縣)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강력한 봉공정신과 위민의식으로 부조리한 사회의 폐단을 개선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녹문은 양근군수에 이어 다음 임지로서 전주판관(全州判官) 및 영천군수(榮川郡守)를 제수받았으며(1773, 62세), 이듬해에는 내직으로 불리워 사도시(司導寺) 첨정(僉正, 종4품)과 군자감(軍資監) 정(正, 정3품)을 제수받았으나 실제로 부임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그해 가을 성천부사(成川府使)10)의 직에 임명되어 부임하였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인해 그의 공직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관리들의 사찰을 담당한 사헌부의 관원이 “경술(經術)에는 남음이 있으나, 고을을 다스리는 일은 능하지 못하다”고 하는 내용의 계문을 올려, 부임한지 불과 20일도 안되어 파직되고 만 것이다.11) 당시 녹문은 공무에 쫓겨 부친의 산소를 이장할 여가마저 갖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있던 차여서 별 미련 없이 임지를 떠나 귀향하였다.  녹문은 관직을 떠난 후 다시 학문에 전념다가 1788년 공주 녹문에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사상의 연원


  녹문을 비롯하여 윤지당 및 운호의 학문이 조선 성리학의 어느 계통에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운호가 윤지당의 학통에 대해 언급한 다음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 고조이신 평안감사 금시당(今是堂) 임의백(任義伯)은 사계(沙溪) 김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심(心)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가르침 받으셨고, 아버지 함흥판관 노은(老隱) 임적(任適) 및 큰아버지 참봉(叅奉) 임선(任選)은 황강(黃江) 권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직(直)’ 자의 가르침을 받으셨으며, 중씨(仲氏) 성천부사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는 도암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道에서 떠날 수 없다”는 의리를 들으셨고, 孺人은 중씨에게서 수학하였다.12)


  이글을 통해 녹문 형제의 학문은 율곡(栗谷, 李珥 1536-1584)를 종조로 하는 기호학파 성리학의 학통 속에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듯 ‘학파’라고 하는 것은 단지 ‘누가 누구에게서 배웠다’고 하는 사승 관계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공동의 학문적 목표 내지는 일관된 철학 이론이 있을 때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다. 녹문학파가 크게는 기호학파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의 공통의 사상적 지반은 무엇으로 지적될 수 있는가? 운호도 지적하였듯이 그것은 바로 ‘심(心)에 대한 탐구’이다.

  율곡이 퇴계(退溪, 李滉 1501-1570)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반대하고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펼친 이후 그를 계승하는 기호지역의 성리학자들에게는 기로 인해 발현하는 인간의 정신현상[心]이 도덕 실천 능력을 구비하고 있음을 입증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되었다. 율곡은 이(理)의 자발성을 부인하였는데, 그것은 자칫 ‘이가 사물(死物)화 되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순결한 도덕성이 현상화되기 어렵게 된다’는 혐의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호학파 성리학자들은 율곡이 주장했던 바대로 ‘심은 기’라고 하는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하면서 그 심이 인심(人心)으로만 흐르지 않고 도심(道心)으로 발현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찾고자 노력한 것이다.

  녹문이 기호학파 성리학의 ‘윤리적 심론’을 자기 학문의 주제로 계승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그가 19세 때부터 20대 중반까지 도암 이재로부터 가르침을 받게 되면서 이루어졌다.  이 즈음 도암을 비롯한 비롯한 기호지역의 학자들은 상당수가 이른바 ‘인물성동이론변(人物性同異論辨)’이라고 하는 철학 논쟁에 가담하여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같고 다름에 대한 격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원래 충청 지역에 거주하던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1641-1721) 문하의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과 외암(巍巖) 이간(李柬, 1677-1727) 사이에서 시작되었던 이 논변은 처음에는 인성과 물성의 논의에서부터 비롯되었지만, 이윽고 미발(未發) 상태의 인간 심체(心體)가 순선(純善)하냐 아니냐에 대한 논의 및 심의 허령불매(虛靈不昧)함이 성․범(聖凡)에 따라 같으냐 다르냐 하는 문제로 발전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남당 한원진,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1-1767) 등은 성(性)이란 기질(氣質)로 인하여 특수하게 구체화되는 개개 사물의 특성이니 만물은 각기 다른 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며,13) 인간의 심(心)은 기(氣)에 속하는 것이고 기에는 청탁부제(淸濁不齊)의 차이가 있으므로 비록 미발심(未發心)의 상태라도 거기에는 선의 요소와 악의 요소가 병존한다고 하였고,14) 같은 인류(人類)라 할지라도 기질의 청탁주제한 차이가 있는 만큼 성인과 범인의 심성은 서로 다른 면이 있다고 하였다.15)

  이들의 주장은 이(理)를 보편적 가치의 가능적 원리로, 기(氣)는 그 이의 가능성을 현실화 하는 자발성을 가진 질료로 보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기본 입장에 근거하여 모든 구체적인 것은 기의 특수성에 기인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담긴 하나의 문제점은 이 구체성의 토대인 기는 청탁부제한 것이므로, 그것에 의해 구체화되는 인간의 심도 청기(淸氣)에 의한 선한 일면과 탁기(濁氣)에 의한 악한 일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고 보는 점이다.

  이에 반해 외암 이간, 도암 이재 등의 인물성동론자들은 인간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존재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기에 의존하여 이루어졌지만 그것의 본성은 어디까지나 그 기에 영향받지 않은 순수한 이(理)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또한 그러한 이는 사물에 따라 차이가 있지 아니하다고 주장하였다.16) 또한 그들은 인간의 도덕성 발현의 주체가 되는 심은 비록 그것이 기에 의존하고 있다고는 하나, 청탁부제한 기품(氣稟)과는 엄격히 구분되는 것으로서, 스스로 기품의 혈기를 물리치는 주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17) 성인과 범인의 심체(心體)와 명덕(明德)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맹자 성선(性善)의 취지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8)

  인물성동론자들의 이같은 입장은 성리학의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서 주안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 능력의 근저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녹문의 임성주의 철학은 바로 인물성동론자들의 이같은 윤리적 심성론을 지반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3) 일원적(一元的) 심론(心論)의 정립


  녹문의 철학은 남당․외암․병계․도암 등의 학자들 사이에서 문제시 되었던 심체(心體)의 순선성(純善性) 문제에 대한 답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잉태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녹문은 심의 순선성을 확보하기 위해 심을 이루는 기의 순선성을 강조하였으며, 그 결과 순수(純粹)와 잡박(雜駁)을 이․기(理氣)에 분속시키는 이기이원론적(理氣二元論的)인 구도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녹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주의 사이에서 위 아래 곧바로, 안팎이 없이, 시종이 없이 가득차서 수많은 조화를 만들어내고 수많은 사람과 사물을 낳는 것은 단지 하나의 기(氣)일 따름이다.19)


  자연의 모든 운화 현상을 하나의 생명 현상으로 파악한 녹문은 그와 같은 자연 현상을 가능케 하는 궁극적인 존재를 명확하게 ‘기(氣)’라는 이름으로 지칭하였으며, 이 기 이외의 ‘이(理)’라는 이름의 독립적인 실체가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녹문은 본체를 설명함에 있어 이(理)라는 이름도 버리지는 아니하였으나, 그 내용은 유일한 실재인 기의 내재적인 특성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녹문이 유기론자(唯氣論者)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학문 속에 이와 같은 이론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 주의해야 할 점은 그가 종래 성리학에서 추구해 오던 가치관에 반대하여 이․기의 위상을 전도시키려 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윤리성의 근거가 되는 이(理)는 녹문에게도 더없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는 다만 일원(一原)을 이(理)에만 돌리고 기(氣)를 분수(分殊)로만 이해하는 종래의 성리설을 따르게 되면 그 윤리성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적인 힘을 얻지 못하고 관념적인 가능성에만 머물게 되는 점에 유념하였다.

  성리학에서는 맹자가 인간 도덕능력을 받쳐주는 근거로 이야기한 ‘성선(性善)’을 보편적인 이(理)의 선(善)으로 설명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기질은 차별적인 기로 이루어진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율곡 이래 우리나라의 기호학파 성리학에서는 사단칠정(四端七情)이라고 하는 인간의 구체적인 정신작용은 모두 기에 의해 주도되어 발현된다고 하는 이론을 정립하였다. 이 이론들을 따르게 되면 인간이 아무리 순수한 이(理)를 자신의 본성으로 보지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가능성에 그칠 뿐 현실로 드러나는 정신과 육신의 작용은 기의 지배를 받아 선과 악이 함께 하는 모습일 수밖에 없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인간의 도덕 실천력을 기반으로 윤리적 이상 사회를 이룩하고자 한 성리학의 목적 의식에 부합하는 이론이라고는 할 수 없다.

  녹문은 인간의 도덕 능력이 추상적인 성(性)의 차원이 아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심(心)의 차원에서 확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종래의 성리학, 특히 기호학파의 성리학에서는 성을 이로, 심을 기로 이해하였다. 개체에 품부된 이(理)로서의 성은 순수하지만 활동력이 없고, 심은 활동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기가 차별적인 존재인 만큼 여기에는 선악의 가능성이 혼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그 이론의 골자였으며, 이러한 견해를 묵수한 것이 바로 남당을 비롯한 호서학자(湖西學者)들이었던 것이다. 호학(湖學)의 비윤리성을 성토한 낙학(洛學)의 계승자로서, 녹문은 인간의 도덕성이 현실적인 실천능력으로 확립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성과 심을 이원적으로 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도달하였다.

  성과 심을 구분하는 사고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와 기를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는 한 한 성과 심은 하나가 될 수 없다. 녹문은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의 몸체[體]는 지극히 크고 순수하니 그 덕(德)도 또한 지극히 크고 순수하다.  몸체는 바로 기(氣)요, 덕은 바로 이(理)이니, 기(器)가 곧 도(道)요, 도(道)가 곧 기(器)인 것이다.20)


  녹문이 가졌던 이기 개념은 ‘이기동실(理氣同實)’, 즉 이와 기는 하나의 실체를 각기 다른 측면에서 지칭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자학에서도 이기의 불상리(不相離)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이와 기가 판연히 다른 두 개의 실체[理氣決是二物]로서 서로 혼효될 수 없는 것이되[不相雜] 현상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속에서는 떨어지지 않고 공존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녹문이 말하는 이기동실의 뜻은 그러한 차원이 아니다. 이와 기는 본래부터 하나인 어떤 근원적 존재의 두 가지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기가 하나라면 그것의 인간적인 형태인 성과 심도 당연히 하나로 이해되어진다. 녹문은 인간의 성과 심이 ‘이기동실’인 하나의 실체에서 온 것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정자가 말한 형체의 천(天)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바로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이다. 장자(張子)가 말한 담일(湛一)은 기의 근본이니 심은 그 영(靈)이요 성은 그 덕(德)이다.  이 기가 없다면 심과 성이라는 이름 또한 스스로 설 수가 없다.21)


  심을 기로 이해하는 것은 기호학파 성리학의 공통된 이론이니 새롭게 주목할 것이 없다. 그러나 성의 근거를 기로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녹문의 지극히 의도적인 입론이다. 성과 심은 하나의 실체에서 나왔기 때문에 항상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한 녹문의 보다 분명한 의사는 바로 이러한 것이다.


심(心)과 성(性)은 하나이다.  지적함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달리 이름할 뿐이다.  정자는 말하기를, 형체로써 이름하면 천(天)이요, 주재로써 이름하면 제(帝)요, 묘용으로써 이름하면 신(神)이요, 성정으로써 이름하면 건(乾)이라 하였다.  건(乾)은 곧 성(性)이요, 제(帝)와 신(神)은 심(心)이니 사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까닭에 성을 말하면 심은 저절로 지적되며 심을 말하면 성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22)


  녹문이 이처럼 심․성을 한 가지로 보고 또 그것이 모두 인간의 기에 근원을 둔다고 이야기한 것은 본체를 기로 일원화하고 그것에 순선의 가치를 부여한 그의 본체론의 필연적인 결론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역으로 생각하면, 이와 기를 하나로 본 본체론은 인간의 사려․동작의 주체인 심이 순선한 것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마련된 전제였다고도 할 수 있다. 녹문은 자기 사상의 요지를 ‘이기동실(理氣同實), 심성일치(心性一致)’라는 두 마디 말로 대변하였는데,23) 그 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후자인 심성일치이다. 녹문의 관심은 본체론보다는 인성론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 인성론에서 녹문이 확립하고자 한 것은 심․성을 구분하지 않는 일원적인 심체(心體)의 존재였다. 녹문은 이같은 일원적 심체의 존재를 상정한 후 거기에서 거꾸로 유추하여 본체의 세계에 심체의 존재 근거가 되는 일원적인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기를 일원적으로 이해하고자 한 ‘이기동실’이라는 명제는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됐다. 심․성의 구분이 없는 인간의 통일적인 심체를 본체의 세계에 투영하여 그것을 우주의 일원적인 존재 근거로 삼은 것이다.

  녹문이 평생 그의 학문의 과제로 삼았던 것은 그가 도암로부터 물려받았던 ‘심설’, 즉 인간의 구체적 정신현상의 주재인 심이 도덕을 실현할 수 있는 순수하고 역동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능력은 인간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성선’을 단지 이(理)의 善으로만 이해하고 기로 이루어진 심은 有善有惡으로 이해할 경우 선을 행한다고 하는 인간의 도덕 능력은 단지 가능성에만 그치게 될 뿐임을 그는 경계했던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인간의 도덕 능력을 性만이 아닌 心의 차원에서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3. 임윤지당(任允摯堂)의 사상


  1) 생애


  윤지당 임씨(任允摯堂, 1721-1793)는 임성주의 여동생이다. 여성의 역할이 가사와 생산 노동에 국한되었던 조선시대에 윤지당과 같이 학문적 업적을 남긴 여성 학자가 있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조선시대의 재인으로 신사임당(申師任堂)이나 허난설헌(許蘭雪軒) 등의 여성이 이름을 남겼지만 이들의 업적은 주로 예술 분야에서 이루어졌지 남성들의 전유물이다시피한 학문 분야는 아니었다. 그러한 점에서 윤지당의 특이한 업적은 조선시대의 사회사나 여성사 분야에서도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본고에서 목적하는 바는 임성주 일가의 학문적 특색을 살피는 것이므로 이 점에만 국한하여 그의 학적 성취의 내용을 보기로 한다.

  윤지당은 여성이었던 만큼 남자들처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일정기간 누구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는 등의 경험을 쌓지는 않았다. 그 시대의 여느 사대부가 여인처럼 젊었을 때 다른 집안에 시집을 가 그 집안의 주부로서의 삶을 살았다. 특이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어렸을 때부터 총명한 자질을 드러내어 다른 가족들의 귀여움을 받았고, 자연스럽게 그들로부터 성리학의 지식을 전수받았다는 점이다.

  녹문 형제의 부친 노은공이 돌아갔을 때 윤지당의 나이는 8살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형제들은 어머니를 모시고 청주에 내려갔는데, 이곳에서 이들은 부친이 안계신 가운데에도 가정의 의례를 엄격히 하여 가풍을 보존하며, 형이 아우의 학문을 훈도하는 등 학문 연구에도 진력하였다.24) 이때 윤지당은 오빠인 녹문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며 그에게서 경사의 지식을 익혔다. 윤지당이 여자이긴 했으나 그의 영명함이 뛰어나 가족들은 그에게 학문을 가르치거나 의례에 참여케 하는 것을 즐거이 여겼던 듯하다.25)

  윤지당은 19세(1739)에 원주 지방의 신씨 집안에 출가하였으나 8년만에 남편이 죽어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었다. 그의 남편 신광유(申光裕)는 큰아버지 댁의 양자로 들어갔었기 때문에 그는 생가와 양가의 두 시어머니를 모셔야 했고, 또 그 자신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남편의 친동생 신광우(申光祐)의 자식을 양자로 들였다. 이로 인해 윤지당은 남은 생애를 시동생 집에서 보냈는데,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그의 지위에 어긋남이 없는 품행을 보여 가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친정에서 학문을 익혀오긴 했어도 시집간 후에는 여자가 학문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를 꺼려했는지 일체 책이나 문자를 가까이 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다가 노년에 이르러 조심스럽게 독서와 저술을 다시 시작하였다. 평소에 그를 극진히 섬겼던 시동생조차 노년에 이르러 밤중에 윤지당의 방에 불이 켜 있고 낮은 목소리로 책을 읽는 것을 목도한 연후에야 그가 은밀히 학문에 뜻을 두어 왔음을 알았다고 한다.26)

  윤지당은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으며, 시집간 지 10년도 못돼 과부가 되었고  자식도 없었으며 양자마저도 후사를 남기지 않은 채 자기보다 일찍 죽었으니, 그 시대의 가치관으로 보면 지극히 박명한 여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정황이 그로 하여금 이른바 삼종의 굴레에서 벗어나 어느정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학문을 접할 수 있게 한 원인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조선유학사상 거의 유일하게 학술적인 저작을 남긴 여류 성리학자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물론 그의 저술이 민멸되지 않고 책으로 간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윤지당의 저술은 그의 사후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라고 하는 이름의 서책으로 친동생 임정주와 시동생 신광우에 의해 간행되었다.


  2) 본체론(本體論)


  서른 다섯편에 불과한 <<윤지당유고>>의 글은 모두가 이기심성(理氣心性)에 대한 이론이나 윤리적 수양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며, 문예를 즐기는 사장류의 글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점은 녹문이나 운호의 문집의 성격과도 상통하는 점이다. 그들 형제가 얼마나 도학에 열중하였으며 문장의 외도를 경계했는지를 알 게 하는 점이기도 하다. 윤지당의 글 가운데 특히 <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과 <사단칠정인심도심설(四端七情人心道心說)>이라고 두 편의 글에서는 그의 학문의 특징을 여실히 살펴 볼 수 있다.

  윤지당의 본체관과 심성관은 그의 오빠 녹문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고 해도 무방하다. 녹문 철학의 대체라고 할 수 있는 ‘이기동실(理氣同實), 심성일치(心性一致)’의 사고가 그의 저술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윤지당은 녹문이 했던 것만큼 치밀하고 다각적인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다. 녹문은 ‘심의 윤리적 실천 능력 확보’라고 하는 문제의 해답을 얻는 과정에서 이기․심성의 문제를 근원에서부터 다루어 갔기 때문에 그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사변과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윤지당의 경우 오빠가 이미 결론지은 이론을 수용하여 그것을 자기 삶 속에서 체현하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의 학문에는 장황한 이론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윤지당이 단순히 녹문의 철학을 아무런 반성없이 축자적으로 답습한 것에 그친다는 얘기는 아니다. 윤지당은 학문은 녹문보다 더욱 간결하고 명료하게 그들 사상의 핵심을 드러내는 면이 있다. 녹문의 철학이 윤지당에게 이어져 더욱 숙성하였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윤지당은 이(理)와 기(氣)가 하나라고 하는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람들은 주자(朱子)가 이 이(理)가 있고 나서 이 기(氣)가 있다고 한 말을 잘못 이해하여 태극(太極)은 형기를 초월하여 하나의 권역을 이루는 것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아니하다. 기가 없다면 이는 무엇에 의존하여 조화를 이루겠는가? 태극은 음양(陰陽)의 이에 불과하니 음양 밖에 별개의 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음양이 자연스럽게 이와 같음을 일컬어 이라고 하며, 이가 지극하여 더 더할 것이 없음을 일컬어 태극이라고 하는 것이다.27)


이와 기에 대해 선후를 말할 수 있다면 동정․음양에 단서와 시작이 있게 될 뿐 아니라 기(器)와 도(道) 역시 둘이었다가 하나로 합쳐지는 물건이 될 것이다. 정자(程子)의 말이 어찌 이와 같겠으며, 주자(朱子) 또한 어찌 본래 혼융하여 사이가 없다고 했겠는가? 말에 얽매여 참 뜻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28) 


  원래 전통적인 주자학에서도 이와 기는 독립적인 존재지만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여 ‘이기의 불상리(不相離)’를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윤지당은 그 ‘이기의 불상리’라고 하는 것은 별개의 이․기가 현상 세계에서는 어우러져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근원에서부터 하나였다고 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와 기에 대해 “두 개였다가 하나로 합쳐진 것이 아니다”라고 한 윤지당의 이 말은 그의 이기동실론이 주자학의 일반적인 이기불상리론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리학에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사실은 이와 기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합쳐진다’고 하는 것은 원래 별 개의 것이었던 것이 하나로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주자학의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는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이라는 명제와 함께 표리를 이루는 것이며, 그 양자 중에서 ‘이기불상리’가 현상 세계 속의 이기에 대한 성찰이라고 하면, ‘이기불상잡’은 이․기의 보다 근원적인 모습에 대한 성찰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주렴계 이래의 성리학 이론의 발전 과정을 보아도 이 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주렴계(周濂溪)는 그의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무극지진(無極之眞)과 이오지정(二五之精)이 묘합하여 만물을 생성한다고 하였으며, 장횡거(張橫渠)는 태허(太虛)의 기를 다시 허(虛)와 기(氣)로 이분하여 그것의 현상화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정이천(程伊川)은 그러한 토대 위에서 염계의 무극지진, 횡거의 허를 이(理)로 독립시켜 그것이 현상세계를 있게 하는 원인[所以然]이 된다고 하였다. 한 마디로 주렴계에서부터 정이전까지의 성리학 이론 발달은 ‘일원(一元)’에서 ‘이원(二元)’으로 이행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렇듯 이와 기를 분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은 순수선으로서의 이의 독자적인 입지를 확보해 주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도덕적 주체성에 대한 인식이 투철하지 못했던 그 시대에 형이상학적 도덕 내원[理]의 실재성과 존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현상적 질료[氣]와 분리시켜 독립적인 실체로 간주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근원적 도덕성을 확인한 이후에는 그것을 다시 인간의 현실적인 구체성과 일치시키는 노력이 따라야만 했다. 이가 관념 세계에 머물 경우 그것의 존엄성을 아무리 강조한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의 현실적인 도덕 능력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성리학은 이기이원론을 완성하여 근원적 도덕 내원으로서의 이를 확인한 이후 필연적으로 그것을 다시 현실 속에 귀속시키는 일원화의 과정을 밟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기에 대해 그것이 둘이었다고 하나로 된 것이 아님을 말하는 윤지당의 논리는 중국 명대의 이기일물론자 정암(整庵) 나흠순(羅欽順, 1465-1547)을 연상케 한다.  그는, 주렴계의 태극도설에 담긴 이원론적 시각에 대해, “무극의 진수와 음양오행의 정기가 묘합하여 응결한다는 귀절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물은 반드시 두 가지가 있는 후에라야 합한다고 할 수 있다.  태극과 음양은 과연 이물(二物)일까?”라고 의문을 제기하였으며,29) 횡거가  “태허(太虛)로 말미암아 천(天)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고, 기화(氣化)로 말미암아 도(道)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으며, 허(虛)와 기(氣)가 합하여 성(性)의 이름이 있게 되었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성․명(性命) 본래의 이치가 아닌 듯하다”고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30)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정암은 정이천이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은 도가 아니며 그렇게 되는 원인이 도이다”라고 한 것을 적절치 못하다고 여겼다.31) 그는 대신 “음양이 바로 도”라고 한 정명도(程明道)의 도기일체관(道器一體觀)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였다. 녹문도 정암의 이같은 일원적 본체관을 극찬한 적이 있었지만,32)  윤지당 역시 정암이나 녹문이 가졌던 의식 수준에 도달였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2) 심론(心論)


  윤지당이 이와 기를 동일시하는 일원적 본체관을 개진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이로 설명되는 도덕성과 기로 설명되는 역동성을 하나로 합치시켜 인간의 도덕적 실천능력을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윤지당은 인간의 심이 도덕적이면서 실천적인 주재력을 보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 이론은 왜 필요한가? 이(理)로 설명되는 성의 선함만 가지고는 인간의 도덕 능력이 완벽하게 입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녹문도 줄기차게 주장해 온 바였지만, 윤지당은 그 그 이유를 녹문보다 더 직설적으로 밝혀 준다.


성(性)이라고 하는 것은 심(心)이 갖추고 있는 이(理)이며, 심이라는 것은 성이 깃들어 있는 그릇이니, 이는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허령한 신명이 헤아릴 수 없이 변화하는 것은 심(心)이며, 허령한 신명이 헤아릴 수 없이 변화하게 하는 것은 이(理)이다. 이에는 작위 능력이 없지만, 심에는 작위 능력이 있고, 이에는 드러나는 모습이 없지만 심에는 드러나는 모습이 있으니, 이가 없으면 발현할 것이 없고 심이 없으면 발현하게 할 수가 없다. 어찌 이기(理氣)가 서로 혼융한 마당에 성이 홀로 발현하고 심이 홀로 발현하는 이치가 있겠는가?33)


  이론은 단순하게 만들면서 주장하는 바는 더 분명하게 하는 것. 윤지당의 학문은 이 점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인다. 위에 인용된 윤지당의 말은 율곡에서부터 녹문에 이르기까지 기호학파 성리학이 발전시켜 온 심성론의 논지를 압축시켜 놓은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인간의 도덕성이 ‘성선(性善)’이 아닌 ‘심선(心善)’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지만 심의 작위 능력에 힘입어 인간의 실천적인 도덕 능력이 입증되기 때문이다. 윤지당의 이 글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은 그가 선배의 말을 인용하면서 아주 공교한 수정을 가한 점이다. “이에는 작위 능력이 없지만, 기에는 작위 능력이 있고, 이에는 드러나는 모습이 없지만 기에는 드러나는 모습이 있다.”, “이가 없으면 발현할 것이 없고 기가 없으면 발현하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은 원래 주자의 말이요, 율곡의 말이었다. 윤지당은 이 말을 인용하면서 ‘기’라는 단어를 ‘심’이라는 단어로 대치하였다. 이 미세한 수정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율곡은 작위 능력은 기의 전유물임을 근거로 하여 인간의 모든 심리 현상은 기의 발현임을 주장하였지만, 그 시대에 율곡이 생각한 기는 순일한 것이기보다는 청탁부제한 것이었기 때문에 기에 의해 발현되는 인간의 감정은 선한 방향뿐 아니라 악한 쪽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짙은 것이었다. 율곡의 사칠론이 퇴계의 호발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윤리적인 면에서 약점을 지니는 이유는 바로 이점에 있었다. 율곡을 계승한 기호학파 성리학자 중에 남당과 같이 심에 선악의 양면성이 있다고 얘기한 사람이 있게 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제에서는 섣불리 기를 심으로 바꾸게 되면 남당의 주장처럼 심의 선악혼효성(善惡混淆性)을 주장하는 얘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윤지당은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이 품수받은 정통한 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청탁부제의 혐의를 두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기는 혼융무간한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심기는 성을 이루는 이와 비교해 볼 때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순수한 것이다. 윤지당이 율곡의 말을 인용하면서 ‘기’를 ‘심’으로 바꾸게 된 배경에는, 기의 작위 능력을 곧바로 심의 도덕적 실천 능력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지당은 “어찌 이기가 서로 혼융한 마당에 성이 홀로 발현하고 심이 홀로 발현하는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퇴계의 이기호발설의 비논리성을 부정하는 뜻에서 한 말이 아니다. 성과 하나가 된 심은 충분히 도덕성을 발현할 수 있다고 하는 자신감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3) 인물성론(人物性論)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윤지당은 본체론과 인성론에서 그의 오빠 녹문의 사상을 계승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들의 학문의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탁월함을 보였다. 윤지당의 이같은 업적에 덧붙여 한 가지 더 부연하고 싶은 것은 인성과 물성의 동이 여부에 대한 그의 이론이다. 이 점은 바로 녹문의 철학을 이야기할 때 미묘한 문제로 제기되어 온 것이었는데, 이 문제 또한 윤지당의 이론을 빌어 명확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녹문에게 있어 인물성 동이의 문제가 단순하지 않은 것은 그가 초년에는 스승의 입장을 좇아 인물성동을 주장하다가 중년 이후에는 이론(異論)으로 입장을 바꿨는데, 이 점에서 적지 않은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녹문은 호서와 낙하 학자들 사이게 논의되었던 인물성동이논변의 세 가지 주제, 즉 ‘인물성(人物性)의 동이(同異)’, ‘미발심체(未發心體)의 선악(善惡)’ ‘성범심(聖凡心)의 동이(同異)’ 등의 문제 중 두번째 것과 세번째 것에 대해서는 동론자들의 입장을 좇아 미발심체의 순선과 성범심의 상동을 주장하였지만 유독 인성과 물성의 동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서로 다르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34)

  녹문은 인간의 심이 성과 다름없는 순수성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기와 이의 차별을 부인했고 그러한 이기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동일시했다. 그런데 기질지성이 바로 본연지성이라는 전제에서는 사물간에 기질지성이 다를 경우 그 사물의 본연지성도 당연히 다르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타고난 기질이 상이한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는 본연지성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녹문에게서 일어난 성 개념의 변화 추이는 이처럼 단순하지 않는 면이 있다. 그렇다면 녹문이 복잡하게 전개하였던 인물성동이 문제를 윤지당은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윤지당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른바 심(心)이라고 하는 것은 담일(湛一)의 신명(神明)이요, 담일의 신명이라는 것은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이다. 사람과 사물이 천지 사이에서 태어남에 이 생물지심을 똑같이 얻어 자기의 심(心)으로 삼았으니, 그 심에 갖추어진 이(理)는 당연히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금수는 이 기의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어 그 심(心)도 기울었으므로 그 막힘으로 인해 천지지심을 온전히 할 수 없다. 비록 혈기로 인하여 약간의 지각이 있기는 하지만 그속에 간직한 성도 부득불 이에 따라 치우치고 어두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사람의 심(心)은 천지생물지심을 얻은 것이다. 비록 만물과 일체라고는 하나 사람만이 유독 바르고 통한  것을  얻었기 때문에 치우치고 막힌 것을 얻은 것과는 판연히 다르게 사람과 사물의 큰 경계가 나뉘게 된 것이다.35)


  윤지당이 사람과 사물의 차별성에 대해서 언급한 이 말은 녹문이 그의 저술에 남긴 내용과 거의 다름이 없다. 사람은 담일한 기의 바르고 통한 것을 품수하였는데, 동물이나 식물은 치우치고 막힌 것을 받았다는 이야기나,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본체의 담일에 곧바로 통할 수 있는데, 다른 사물은 꽉 막혀 있거나 부분적으로 통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하지만 윤지당의 말은 녹문의 말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 있다. 그는 사람과 사물 간의 차별성을 설명하면서 ‘심’이라는 말을 먼저 사용하였고, 그 ‘심’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부득이 ‘성’도 어쩔수 없이 달라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녹문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은 사실상 ‘인물심이론(人物心異論)’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성’과 ‘심’이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심이(心異)’를 ‘성이(性異)’라고 했던 것이지, 호서 학자들처럼 기의 차별성에 집착하여 ‘성이’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다. 녹문이 자신의 인물성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늘어놓은 많은 이론들, 낙론 계열의 동료 학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썼던 긴 서간에 비하면 윤지당의 인물성론은 지극히 짧고 단순하지만 이 논의의 핵심은 윤지당이 지적한 대로 ‘사람의 심과 사물의 심이 다르다’는 것에 있을 뿐이다. 녹문과 윤지당 사이에 보이는 이러한 식의 복잡함과 단순함의 차이는 어디에 기인하는가? 녹문은 이기이원론에서 출발하여 일원론으로, 심과 성에 대한 차별적 이해에서부터 출발하여 일치론으로 나아간 사람이다. 새로운 이론에 도달하기 위한 사유의 노정이 결코 순탄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많은 설명과 이론이 필요했다. 반면 윤지당은 처음부터 녹문이 이룩한 ‘이기동실, 심성일치’의 토대 위에서 출발하여 그것인 체인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번쇄한 이론을 피하면서도 대요를 잡는 것이 가능했으리라고 여겨진다.



 4. 임정주(任靖周)의 사상


  1) 생애


  운호(雲湖) 임정주(任靖周, 1727-1796)는 녹문 집안의 칠남매 중 막내로 내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당시 그 집안의 거주지였던 서울이었으나 운호의 출생 직후 부친이 사망하자 청주로 거주지를 옮겨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후 11세 때에는 여강으로 17세 때에는 다시 서울로 이거하였다. 그는 36세인 1762년(영조 38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46세 때부터는 녹문의 출신 행로를 똑같이 좇아 세자[正祖]의 경호를 담당하는 익위사(翊衛司)에 들어가 시강에 참여하였고 거기에서 시직(侍直)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는 몇 년 동안 관직을 떠나 있다가 59세 때(1785)에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 종6품)의 직을 맡았고  다음해(1786)에는 외직으로  나가 송화현(松禾縣)36)의 원이 되었다. 61세 때에는 온릉령(溫陵令, 종5품)37)의 직을 맡았다가 다시 지방관으로 나가 청산현(靑山縣)38)의 원이 되었다. 그는 청산현감으로 있는 동안 그의 형 녹문의 문집을 간행하였는데, 이곳에서는 또 선치(善治)를 행하였다고 보고되어 왕의 특명으로 자품(資品)을 더해 받고 중추(中樞)의 직함을 받았다. 1796년(정조 20년)에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운호의 글을 모은 문집 <<운호집(雲湖集)>>은 1817년(순조 17년) 그의 아들 임걸(任杰)에 의해 6권 3책의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는데, 그 문집을 살펴 보면 거기에는 이기심성의 문제를 다른 순수이론적 저작 이외에도 사회 문제의 해결 방안을 다룬 경세론도 적지 않아 현실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이 각별하였음을 알게 한다.

  운호는 일찌기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읽은 후 그 내용에 크게 감동하여 이를 형에게도 추천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한 녹문의 반응이 “그 뜻은 훌륭하지만 현실성이 없다”는 식의 냉담한 것이었는데 반해,39) 운호는 이 책에 대해, “三代 이후에 이만한 책이 없다”고까지 칭송하였다.40) 그는 <<반계수록>>에 기술된 각종 농정(農政) 문제의 쇄신책에 적극 동의하였을 뿐 아니라,41) 노비세습(奴婢世襲)의 폐지,42) 관리등용 및 가계계승에 있어서의 서얼차대(庶孼差待)의 완화,43) 관기제도(官妓制度)의 폐지44)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운호의 이와 같은 경세론은 당대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듯하다. 장지연이 <<조선유교연원>>에서 소개한 바에 의하면, 운호가 정조를 보좌할 때  경학뿐 아니라 토지제도, 교육제도, 군사제도 등에 대해서도 박학한 식견을 피력하므로 정조는 마음을 기울여 청취하였으며, “오늘날의 큰 선비를 꼽는데 있어서 이 사람을 버리고 누구이겠는가?”라는 말로 칭송하였다고 한다. 또한 운호는 그가 경연에서 개진하였던 여러가지 시무책을 정리하여 <<숙예록>>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묶어내었는데, 밀암(密庵) 김지행(金砥行),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 등의 학자는 이것을 보고 “3대 이후에 처음 있는 글”, “내외본말을 겸한 유용한 학문” 등의 말로 상찬하였다고 한다.45)

  운호의 학문에서 보이는 이러한 특징들은 주목하면, 그의 학문이 이기심성의 문제에 대해서만 평생을 고민해 온 형 녹문이나, 여인으로서 학문적 관심의 폭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누이 윤지당의 학문과는 다른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운호의 이와 같은 적극적인 사회 의식도 녹문의 가치관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의 모색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녹문이 평생 동안 가져왔던 투철한 ‘윤리의식’을 보다 넓게 확산시킨 데서 나온 결과라고 여겨진다.  녹문은 도덕 실천의 근거를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데 애쓰느라 그것의 대사회적 실현책인 ‘경세론(經世論)’을 개진할 여가가 없었는데 반해, 운호는 녹문의 노력의 토대 위에서 그것의 응용에 힘쓸 수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회사상을 낳게 되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2) 본체론(本體論)


  운호는 윤지당처럼 녹문을 통해 성리학에 입문하였을 뿐 아니라, 평생 동안 녹문과 가까이 지내면서 마치 사제간 같은 관계를 유지하였고, 녹문이 죽은 후에는 그의 저작을 정리하여 문집으로 간행하는 등 형의 인격을 따르고 형의 학문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다. 따라서 녹문의 철학에 담긴 중요한 논지들이 운호의 철학에 그대로 계승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윤지당의 철학이 그러하였듯이 운호의 철학도 이기심성의 문제에 있어서는 녹문의 것과 거의 한 가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운호는 녹문의 철학을 자신의 언어에 의한 자신의 철학으로 수용하는 가운데 몇가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녹문도 미처 드러내지 못했던 점들을 분명하게 함으로써 후인들로 하여금 보다 용이하게 그들의 학문의 실체를 알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운호는 주위의 학인들로부터 녹문의 철학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많이 들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더 설명해야 할지를 잘 알았다고 여겨진다. 먼저 운호의 철학 가운데 녹문의 일원적 본체관을 계승한 부분을 살펴 보기로 한다. 운호는 심의 근원을 이루는 활성적인 신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른바 생물지심(生物之心)이라고 하는 것은 두 기[二氣]의 양능(良能)이요 담일(湛一)의 신명(神明)이다. 천․인(天人)을 막론하고 이 하나의 신령(神靈)이 활발하게 모든 현상 속에 깃들어 만리(萬理)를 주재한다. 이것이 없으면 일원(一原)의 기(氣)도 있을 수 없고, 이것이 없으면 만수(萬殊)도 있을 수 없다. 형체가 있기 이전에 존재하여 능히 기의 어미가 되고, 형체를 갖게 된 이후에는 기에 구속되지 아니한다. 하늘에 있다고 해서 남음이 있지 아니하고 사람에 있다고 해서 모자람이 있지 아니하다. 주자가 말한 기(氣)의 정상(精爽)은 이 원초적인 양능(良能)이 바른 줄기를 타고 곧바로 내려와 영명하고 활발하여 천인의 구별이 없는 곳을 말한 것이지 형체를 이룬 이후에 기질(氣質)의 사재(渣滓)를 함께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다.46)


  녹문이 이(理)보다 기(氣)를 앞세운 듯한 주장을 하였을 때 주위 사람들이 놀랐던 이유는 그 기를 단순히 물질적 질료로서의 기 또는 차별적인 분수(分殊)로서의 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녹문이 보았던 기의 모습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理)와 더불어 혼융무간의 묘를 이루고 있는 일원(一原)으로서의 기, 순순한 인간의 심에 곧바로 대응되는 활성적인 신명을 본 것이다. 녹문이 뒤집어 놓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와 ‘기’의 위상이 아니라 이․기를 일차적인 존재로 보고 심을 이차적인 것으로 보는 이론 구조 그 자체였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즉 녹문에게 있어서는 ‘심’이 인간에게 있어서나 우주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존재이며 ‘이’와 ‘기’는 그 원리적이고 형태적인 두 측면을 지적하는 부차적인 개념이었던 것이다.

  운호는 녹문의 본체론에 내포된 이와 같은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기의 선후 관계에 대한 복잡한 논의없이 곧바로 이․기를 모두 포섭하는 ‘하나의 신령’(一箇神靈)을 심체의 우주적인 근원으로 제시하였다. ‘생물지심(生物之心)’, ‘두 기의 양능[二氣之良能]’, ‘담일의 신명[湛一之神明]’ 등은 모두 이 활성적인 신령을 이․기에 분속시킴이 없이 근원적인 실체로 지목한 것이다.  그는 이 신령(神靈)을 ‘두 기의 양능[二氣之良能]’이라고 하면서, 그것이 형체를 갖기 전에는 ‘기의 어미’[氣之母]가 된다고 하였고, 형체를 갖게 된 후일지라고 그 기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즉 이 신령은 스스로 유형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며, 유형의 사물을 만든 후에는 그 속에 영활하게 깃들어 자신의 영명함을 제약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운호가 이와 같은 영묘한 일원적 본체를 언급한 것은 두 말할 필요 없이 심체의 순수성을 받쳐주는 형이상학적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심(心)은 기(氣)의 정상(精爽)’이라고 한 주자의 말을 빌어 인간의 심은 이 원초적인 양능이 스스로 담일한 기의 바른 줄기를 타고 인간에게 내려 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인용한 것은 분명히 주자의 말이되 그것을 통해 주장하는 것은 그 자신의 말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상 세계에 내려와 차별적인 구체성을 갖게 된 여러 종류의 기 가운데 맑고 깨끗한 성질의 기가 인간의 심기(心氣)를 이룬다’고 하는 것이 ‘심은 기의 정상’이라는 말에 대한 종래의 해석이었다고 한다면, 운호의 해석은 ‘정상한 우주의 본체가 곧바로 인간에게 내려와 심체(心體)를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심체는 형체를 이룬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그의 부연 설명은 이 점을 더욱 명확하게 해 준다.


  3) 심선설(心善說)


  주자학에서는 순수한 본체로서의 이가 곧바로 인간에게 내려와 인간의 성체(性體)를 이룬다고 하였지만, 운호는 영명한 본체의 기가 곧바로 인간에게 내려와 인간의 심체(心體)를 이룬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일분수(理一分殊) 대신 기일분수(氣一分殊)를 이야기한 녹문의 진정한 의도였음은 더 이상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심체의 본원적 위상을 이러한 식으로 분명하게 정립해 놓은 운호는 이제 ‘심선론’이라고 하는 녹문학파의 도덕적 인성론을 마무리짓는다.

  ‘성’의 선함뿐 아니라 ‘심’의 선함이 입증되어야 인간의 진정한 도덕성이 인정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녹문 철학의 기저를 이루는 문제 의식이었으며, 또 그것은 녹문 이전에 외암이나 도암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대체로 이론의 방향성이 잡혔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종래의 성선론이 인성의 윤리적 지반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불완전한 구석이 있음을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심선론’이 그에 대한 대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아니하였다. 그에 비교해 볼 때 운호는 훨씬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심선론의 당위성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호서 학자들은) 단지 성선을 위주로 하여 기질을 교정할 수 있을 것으로만 알았지 심이 본래 악하다면 성이 홀로 선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몰랐다. 설사 성이 홀로 선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理)는 본래 작위 능력이 없는데 누가 그것을 주장하여 기질을 교정할 것인가? [기질이 혼탁한 중에도 담일한 신명은 처음부터 전혀 쉼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할 줄 알아 탁박한 것도 맑고 순수하게 하며, 어리석고 모자란 것도 변화시켜 어질고 지혜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47)


무릇 우리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심선(心善)은 본심이 지극히 맑고 더럽지 않기 때문에 능히 본성(本性)의 순선무악(純善無惡)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발(未發)의 때에는 조용하면서도 깨어있어 천하의 대본(大本)이 되고 이발(已發)의 때에는 바르고 반듯하여 만사의 기강(紀綱)이 되며, 천하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내 마음의 체(體)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 없고 세상의 사물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내 마음의 용(用)이 관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48)


  운호의 이 말은 심선설을 부정하는 남당 계열의 학자들을 상대로 한 말이지만, 대상을 꼭 그들로만 한정지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사실상 관념적인 성의 선으로만 인간의 도덕성을 입증하려 했던 전통적인 주자학에 대한 비판이 될 수밖에 없다. 인용문에서 드러났듯이 운호는 성선만 가지고는 인간의 현실적인 악을 제거할 수 없음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성선이란 이(理)의 선을 말하는데 이는 무작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성리학에서는 기질을 교정함으로써 선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기질의 교정을 행하는 주체는 과연 누구이겠는가? 이와 기를 두 가지로 구분한 위에 기는 악하고 이는 무력하다고 하면 이에 의해서도 기에 의해서도 인간의 악은 제거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의 성선론은 인간의 도덕성을 관념적인 차원에서만 확보해 줄 뿐 현실 속의 인간은 악의 세계에 내버려 두는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운호의 이와 같은 심선론에는 과거의 주자학적 성선론에서 볼 수 없는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철저한 믿음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질의 말류 사재에 의해 일어나는 악은 비본질적인 것이며 그것은 담일한 심의 신명에 의해 언제라도 변화되고 제거될 수 있다는 확신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4) 수양론


  운호의 문집에 담긴 글들을 살펴 보면, 그가 본체론과 인성론에서 ‘이기동실(理氣同實), 심성일치(心性一致)’라고 하는 녹문 철학의 대요를 계승하여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수양론에서는 형이 주장한 ‘본체즉공부론(本體卽工夫論)’을 더욱 정비된 이론으로 만들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녹문의 본체즉공부론(本體卽工夫論)은 인간의 수양 공부를 약동하는 도체(道體)의 부단한 유행의 연장으로 이해하여 심체(心體)․성체(性體)를 자연스럽게 보존한다는 것이다. 성리학의 전통적인 심성 수양법은 ‘경(敬)의 공부’였는데, 그 내용은 이른바 ‘주일(主一)’, 즉 외물에 이끌려 마음을 이리저리 방황하게 하는 것을 막고, 내 마음의 내면에 집중하여 그것을 바르고 우뚝하게 세우는 것을 의미하였다.49)  녹문 역시 내면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노력을 ‘경의 공부’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활발한 우주적 생의(生意)를 기(氣)라는 이름의 본체로 상정한 녹문에게 있어서는 그 내면의 마음 또한 단지 고요하기만한 부동의 실체가 아니라 부단한 자기유행을 계속하는 활성적인 신명(神明)이었기 때문에  녹문의 경(敬)은 ‘도체(道體)의 직접적 체인(體認)’이라고 하는 특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녹문이 생각한 경은 처사접물시(處事接物時)에 그것에 전일(專一)하여 마음을 흐뜨러뜨리지 않게 하는 노력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으로 내 마음이 바로 도체의 순수하고도 그침이 없는 유행임을 체인하는 것이었다.50) 그는 주일(主一)의 일(一)을 인간의 성체(性體)․심체(心體)로 이해하였으며, 그 일(一)에 주력하는 경(敬)은 성체․심체를 그침없이 보존하는 일로 보았다.51)

   운호는 녹문의 이같은 생각에 영향을 받아 그 자신도 본체와 공부를 하나로 삼는 수양론을 개진하였다. 본체와 공부를 왜 하나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운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임금이 의롭고 신하가 충성스럽다’고 하는 경우 의로움[義]과 충성스러움[忠]은 본체이며, 의롭게 되고[能義] 충성스럽게 되는 것[能忠]은 공부이다. 또한 ‘아버지가 자애롭고 아들이 효성스럽다’고 할 경우 자애로움[慈]과 효성스러움[孝]은 본체이며 자애로와지고[能慈] 효성스러워지는 것[能孝]은 공부이다. 미루어 보면 만가지 일이 모두 그러하니, 이것은 ‘지름길을 좋아하고 빨리가기를 바라는 것’[好徑欲速]과는 취지가 다르다. 원래 본체(本體)와 공부(工夫)는 능․소(能所)의 구별이 있을 뿐이지 두 가지 일이 아니다. 대덕(大德)에도 본체와 공부가 있고 소덕(小德)에도 본체와 공부가 있으니, 깊이 완미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왜 병통이 되는지 알 수 없다.52)


  이 글은 운호가 ‘본체즉공부론’ 속에는 혹시 양명학적인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기미가 있지 않나 의심하는 학우들에게 보낸 해명성 서한의 일부분이다. 운호의 설명에 따르면 본체는 ‘인간이 실현해야 할 윤리적 덕목’ 그 자체이며, 공부는 ‘그 덕목을 실현하는 것’이다.  운호는 이 양자 사이에는 ‘능․소’의 구별, 즉 ‘목표로 하는 대상’[所]과 ‘실천하는 행위’[能]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로 보아야 할 일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운호가 사용한 능․소라는 말은 ‘非理則無所發, 非氣則不能發’이라고 할 때의 능․소와 같은 것이다. 즉 이(理)가 없다면 실현해야 할 대상이나 목적 자체가 없어지므로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가 맹목으로 흐를 것이요, 기가 없다면 목표는 있어도 실천하는 능력이 없으니 그 목표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녹문과 운호는 인간의 도덕성이 공허한 가능적 원리에 그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미 이와 기를 하나로 하는 이론을 정립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본체와 공부를 하나로 보는 것은 ‘이기동실’, ‘심성일치’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운호가 능․소의 논리로 설명한 이 본체즉공부론의 내용은 도덕성과 자발성을 겸비한 도체의 자연스러운 유행에 의해 저절로 도덕이 실현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운호는 대덕(大德)에도 본체와 공부가 있고 소덕(所德)에도 본체와 공부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대덕과 소덕은 성리학에서 말한는 함양(涵養)과 궁리(窮理)라는 두 가지 공부의 실현 목표이다. 함양은 미발의 본체를 직접적으로 체인하는 것이요, 궁리는 다양한 사물을 접하면서 그 원리를 궁구하는 것이다. 운호가 이 두 가지에 다 같이 본체와 공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양자 모두 도체의 자발적인 발현을 돕는 것이 중요하지, 체인할 목표[所]와 체인하려 하는 노력[能]을 두 가지로 나눈 채 의지로써 그 목표에 도달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운호의 이같은 이론은 의심할 바 없이 녹문이 그의 <존존감기(存存龕記)>나 <주일명(主一銘)> 등에서 주창하였던 본체즉공부론을 이어받은 것이다. 또한 녹문의 수양론이 전적으로 명대의 주륙절충론자 경일(景逸)  고반룡(高攀龍, 1562-1626)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상기하면 운호 역시 그 맥을 이어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녹문과 운호의 학문이 주자학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 학문의 귀결점을 보게 되면 그것이 과연 온전히 주자학의 범주 안에 머무는 것인가 하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는 면이 있다. 본체즉공부를 주장하여 궁리와 함양을 양대 지주로 삼는 정통적인 주자학의 수양론 중 궁리의 의미를 약화시켜 버린 것이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증거라고 하겠지만, 그 외에도 성보다 심을 중요시한 인성론이라든가 이․기로 나뉘지 않는 활성적인 신명을 우주의 본체로 삼은 본체론 등은 다분히 ‘심학(心學)화 되어 가는 주자학’의 모습을 보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녹문 자신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자기는 주자의 문자에 얽매이기보다는 주자의 정신을 따른다는 식으로만 생각했을 수 있겠지만, 운호는 자신들의 철학이 흘러가는 방향을 어느정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미약하나마 그가 심학에 관한 한 녹문에 비해서는 어느정도 융통성 있는 자세를 취한 증거가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53)


  5. 녹문학파(鹿門學派)의 철학적 성격


  지금까지 녹문․윤지당․운호 3인의 성리설을, 그들의 일원적인 본체관 및 심성관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윤지당과 운호의 철학은 녹문의 철학을 충실히 이어받아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간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서로간에 차이나게 드러나는 독특한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이 공통적으로 지향한 학문의 목표 및 그 목적 의식에 입각하여 다듬어 낸 철학 이론을 하나의 사상으로 놓고 볼 때 거기에서는 전대 또는 동시대 다른 성리학자들이 이룩하지 못했던 새로운 면모가 돋보인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들의 철학은 이기이원적(理氣二元的)인 주자학을 그 출발점으로 삼았되 이와 기가 더 이상 두 가지로 인식되지 않는 일원적(一元的)인 본체관(本體觀)을 공통적인 특징으로 드러내었다. 그들이 이와 같은 일원적 본체관을 근저에는 인간의 이상적인 본성과 현실적인 정신 능력을 더 이상 별개의 것으로 나누어 보려 하지 않았던 일원적인 심성관(心性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의 철학을 주자학의 영역 내에만 가두어 둘 수 없게 하는 이러한 요소들은 녹문의 학문에서부터 기인한다. ‘이기동실(理氣同實), 심성일치(心性一致)’는 녹문이 세운 새로운 학문의 대체였다.

  그렇다면 윤지당과 운호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조선 유학사상 여성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성리학의 학문적 자취를 남긴 임윤지당. 여인으로서 당시에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성리학을 심도 있게 연구하였다는 것만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하겠지만 윤지당이 한 일은 그런 정도의 상대적 평가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윤지당의 학문은 충실히 녹문을 계승한 것이되 그의 철학의 대체를 더욱 명시적으로 드러낸 공을 남겼다.

  녹문이 인물성동론을 주장한 낙학(洛學)을 자기 철학의 근거로 삼고 있으면서 중년 이후에 인물성이론으로 입장을 바꾼 이유는 녹문 자신의 저작에서보다 윤지당의 이론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될 수 있다. 성(性)이라고 하는 것을 보편적인 이(理)와 연관지으면 동론(同論)의 입장이 더 우세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차별적인 기의 매개를 전제로 성 개념이 성립된다고 하면 인성과 물성만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성품을 다 차별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만일 녹문에게 이 두 가지 입장 중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가 편들 것은 전자이지 후자가 아니다. 그의 이른바 ‘유기론(唯氣論)’은 이와 기가 하나가 된 일원적 실체의 보편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나온 주장일 뿐, 결코 남당과 같은 호서 학자들처럼 기의 차별성을 강조한 이론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당의 심성론에 대해 녹문은 거의 적대적인 감정까지 드러내 보이면서 그것을 배척하였다. 그러면서도 녹문이 인물성의 동이를 논하는 부분에서 이론(異論)을 주장한 이유는 무엇인가? 녹문이 사물 사물에 따라 다른 것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실은 ‘성’이라기보다는 ‘심(心)’이었다. ‘심’은 기질에 의해 구체화된 개별 사물의 역동적인 주재력이다. 사람과 동물․식물 그리고 다른 무생물들은 태어나면서 받은 기의 구조가 다르니 그것을 근거로 구체화되는 심의 발현 모습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내용의 ‘인물심이론(人物心異論)’에 녹문 철학의 기치인 ‘심성일치론(心性一致論)’이 같이 결부되게 되면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된다. 이기가 처음부터 혼융한 것처럼 성은 심과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심이 다르면 성도 그에 따라 그 내용이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윤지당은 녹문의 심성론에 내포된 이와 같은 의미를 명석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 이론화 하였다. 그는 녹문과 같은 논조로 사람과 사물 간의 보편성 및 차별성을 설명하면서 ‘성’이라는 말 대신에 곧바로 ‘심’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기가 혼융하여 하나로 이루어져 있는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은 보편적인 것이되 개별 사물에 품부되는 과정에서 그 기질의 차이로 인해 바르거나 치우치고, 통하거나 막히는 차이가 있게 된다. 이른바 심의 차별성이다. 그러나 이 심의 차별성은 똑같이 바로고 통한 기를 품부받은 모든 인류 사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인과 범인은 똑같은 수준의 영명한 심을 보유하는 것이다. 윤지당이 녹문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인물심이론(人物心異論)으로 명쾌하게 설명해 낸 것은 녹문이 주창하였던 ‘심성일치(心性一致)’의 교설을 녹문 이상으로 완숙하게 소화해 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점에서 보면 녹문의 철학이 윤지당으로 이어진 것은 단지 친동생에게 맹목적인 존신을 받은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이 지향한 궤도를 바르게 좇아 한 걸음 더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과 성을 하나로 한다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을 더 이상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현실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의 실천 능력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윤지당의 성리학은 녹문의 심 중심의 철학을 계승하여 그 특징을 더욱 명시적으로 드러냈다는 의미를 지니다.

  녹문 형제의 막내 동생 운호 임정주의 철학도 윤지당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녹문의 중심 사상을 정리하여 그 궁극적 목표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한 의미를 지닌다. 녹문․윤지당․운호 3인의 철학은 다같이 주자학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지만, 성과 심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그들이 기울인 노력은 결국 그들의 철학을 주자학의 본래적인 틀 속에서만 머물러 있지는 못하게 하였다. 그들의 철학에서 이․기를 둘로 보는 견해가 배척되고 그것이 한 가지로 추구된 것은 이․기의 합(合)이라고 이야기되어 온 심의 위상을 보다 근본적인 차원으로 높이고자 한 의식의 소산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의식은 학문과 수양의 문제에 있어서도 주자학의 전통적인 방법과는 다른 방법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객관적인 사물의 원리를 추구하기보다는 마음을 본체(本體)로 여겨 직접적으로 그것을 깨닫는 공부를 중요시 하였다는 것이다.  

  녹문은 사사물물(事事物物)에 대한 궁리의 과정을 번거롭게 거치기보다는 심체에 곧바로 주력하는 본체공부론을 강조하였는데, 운호는 형의 본체공부론을 적극 옹호하는 한편, 그 나름대로 미발공부론을 피력하여 미발 상태의 심체를 함양하여 바로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역설하였다.54) 녹문과 운호의 사상에서 드러나는 이같은 특징들은 이․기의 문제나 순수리(純粹理)인 본연지성보다는 인간의 주체성인 심을 중시했다는 점으로 모아질 수 있는데, 바로 그러한 면이 육왕의 심학에 상통하는 일면이 있다고 하는 사실은 가볍게 넘길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흔히 조선시대의 성리학은 주자학 일변도의 정태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현실의 추이 및 학자들의 문제의식의 심화와 더불어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고, 또 변화는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성리학사를 바라보는 필자의 시각이다. 녹문의 철학도 그 근저를 파해쳐 보면 심의 윤리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기호학파 낙론계 학자들의 지속적인 문제의식을 계승한 것이며, 낙론계 학자들의 윤리적 심론은 일찌기 퇴계와 율곡의 사단칠정론에서부터 거론되었던 문제, 즉 기에 의한 정신 현상의 발현이 윤리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문제에 관해 그 꾸준히 해답을 추구해 온 노력의 소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퇴․율 이래의 조선 성리학은 ‘성즉리(性卽理)’라고 하는 이상적 본성 차원에서 논의되던 인간의 윤리성을 ‘심’이라고 하는 구체적 정신 작용 속에서 확보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발전해 온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의 주자학이 명대 이후 양명학으로 이어지면서 보인 변화상, 즉 성론에서 심론으로의 이행과 유사한 맥락을 지닌다고도 할 수 있다.

  논문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윤지당․운호를 포함하는 3인의 녹문학파 학인들은 조선 후기에 나타난 조선 성리학의 독자적인 심학화 경향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55) 안타깝게도 녹문학파의 이론은 사승 관계를 통해 후대 학자들에게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그 대에서 단절된 듯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비록 녹문학파와 밀접한 관계를 맺지는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조선 후기의 성리학이 전반적으로 이들이 지향한 것과 유사하게 본체론에서 이․기를 통일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점증하고 성론보다는 심론에 치중하는 경향이 높아지는 사실은 녹문학파의 철학이 단지 그들의 특수한 가학(家學)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조선 성리학의 보편적인 변화 추세 내지는 발전의 방향성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평가를 가능케 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점은 앞으로 녹문학파 이후의 여러 인물들에게서 전개된 성리학 이론들을 보다 면밀하게 고찰하는 연구를 통해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참  고  문  헌 >>


  * 原典

    任聖周, <<鹿門集>>

    任允摯堂, <<允摯堂遺稿>>

    任靖周, <<雲湖集>>


  * 單行本

    金  炫, <<任聖周의 生意哲學>>, 서울 한길사, 1995

    李丙燾, <<韓國儒學史略>>, 서울 아세아문화사, 1986

    張志淵 (柳正東 譯), <<朝鮮儒敎淵源>> (삼성문화문고 59, 134, 135), 서울 三星美術文化財團, 1979

    玄相允, <<朝鮮儒學史>>, 서울 현음사, 1982

    岡田武彦, <<王陽明と明末の儒學>>, 東京 明德出版社, 昭和45


  * 硏究論文

    金洛必, <鹿門 任聖周의 氣哲學>, <<철학논구>> 9, 1981

    金  炫, <任聖周의 生意哲學에 관한 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84

    ------, <任靖周의 理氣心性論>, <<東洋哲學硏究>> 14, 1993

    柳正東, <鹿門 性理說에 관한 考察>, <<閔泰植古稀紀念論文集>>, 1973

    裵宗鎬, <奇蘆沙와 任鹿門의 哲學 비교>, <<연세논총>> 7, 1970

    山內弘一, <鹿門任聖周に於ける天人合一と氣>, <<朝鮮學報>> 110, 1984

    沈在龍, <鹿門 任聖周의 氣哲學 序說>, <<東洋文化國際學術會議論文集>> 2, 成均館大 大同文化硏究院, 1980

    劉明鍾, <羅整庵 氣哲學의 影響 -16․17세기 朝鮮學界의 受容과 批判->, 1975, <<철학연구>> 20

    ------, <吳老州의 理氣說 -羅整庵의 影響과 任鹿門에 대한 批判->, <<철학연구>> 19, 1974

    ------, <任鹿門의 唯氣說과 羅整庵의 氣哲學>, <<철학연구>> 17, 1973

    尹絲淳, <人性物性의 同異論辯에 대한 硏究>, <<哲學>> 18, 한국철학회, 1982

    ------, <朝鮮朝 理氣論의 發達 -그 展開樣相과 性格->,   <<石堂論叢>> 16, 1991

    李迎春, <任允摯堂의 性理學>, <<淸溪史學>> 12, 1996

    鄭仁在, <任鹿門의 氣學>, <<한국사상>> 17, 1980

    趙東一, <朝鮮後期 人性論과 文學思想>, <<한국문화>> 11, 1991

    許南進, <朝鮮後期 氣哲學의 성격 -鹿門 任聖周의 경우->, <<한국문화>> 11, 1991




1)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硏究敎授


2)  현재의 충북 제원군


3)  任靖周, <鹿門先生行狀>, <<鹿門集>> 附錄, 2a - 2b


4)  任聖周, <上陶庵先生>, <<鹿門集>> 권1 書, 1a - 6a / <寒泉語錄>, 같은 책 권17 雜著, 1a


5) 왕실의 계보 담당 관서


6)  임실현은 현재의 전북 임실군


7)  호조 산하의 봉급을 관리하던 관청. 광흥창(廣興倉).


8) 궁중의 음식에 관한 일을 보던 관청


9)  현재의 경기도 양평군


10)  평안남도 성천군


11)  任靖周, <鹿門先生行狀>, <<鹿門集>> 附錄, 9a. 녹문이 파직된 직후, 이 문제는 조정에서 다시 거론되었는데, 대사간 이석재(李碩載)가 녹문에 대한 사헌부의 계문은 무고라고 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이 문제를 야기시킨 경재관(慶再觀)이라고 하는 인물이 사헌부 장령의 직에서 파직되었다.  <<英祖實錄>> 권123, 6a - 6b 참조


12) “我高祖平安監司今是堂公諱義伯, 受業沙溪金先生之門, 得聞師心之訓; 先考咸興判官老隱公諱適, 與伯氏叅奉公諱選, 出入黃江權先生之門, 得聞直字之敎; 仲氏成川府使鹿門公諱聖周, 蚤遊陶庵李先生之門, 得聞道不可離之義; 而孺人又受學於仲氏.” (任靖周, <姊氏允摯堂遺事>, <<雲湖集>> 권6 遺事, 32b)


13) 韓元震, <擬答李公擧>, <<南塘集>> 권11 書, 9b


14) 韓元震, <上師門>, <<南塘集>> 권7 書, 18a


15) 韓元震, <與沈信夫>, <<南塘集>> 권15 書, 19a - 19b


16) 李柬, <上遂菴先生>, <<巍巖遺稿>> 권4 書, 33b


17) 李柬, <未發辨>, <<巍巖遺稿>> 권12 雜著, 26b


18) 李縡, <答尹瑞膺>, <<陶庵集>> 권10 書, 18b


19) “宇宙之間, 直上直下, 無內無外, 無始無終, 充塞彌漫, 做出許多造化, 生得許多人物者, 只是一箇氣耳.” (任聖周, <鹿廬雜識>, <<鹿門集>> 권19 雜著, 3a)


20) “天體至大而至純, 故其德亦至大而至純. 體卽是氣, 德卽是理; 器亦道, 道亦器也.” (任聖周, <答朴永叔>, <<鹿門集>> 권6 書, 42b - 43a)


21) “程子所謂形體之天, 在人則孟子所謂浩然之氣. 張子所謂湛一, 氣之本者也; 心其靈, 而性其德也. 無此氣, 則心與性之名; 亦無自以立矣.” (任聖周, <大學>, <<鹿門集>> 권16 雜著, 1b)


22) “心也性也一也, 在所指如何耳. 程子曰: ‘以形體謂之天, 以主宰謂之帝, 以妙用謂之神, 以性情謂之乾.’ 乾卽性也, 帝與神則心也, 其在人者亦然. 是故言性則心自擧, 言心則性在中.” (任聖周, <大學>, <<鹿門集>> 권16 雜著, 1a)


23) 任聖周, <答李伯訥>, <<鹿門集>> 권5 書, 6a


24) 任靖周, <鹿門先生行狀>, <<鹿門集>> 附錄, 32a


25) 任靖周, <姊氏允摯堂遺事>, <<雲湖集>> 권6 遺事, 29b - 30a


26) 申光祐, <允摯堂遺稿跋文>, <<允摯堂遺稿>>


27) “人多誤認朱子‘有是理而後有是氣’之訓, 乃以太極爲超形氣一圓圈之物; 甚不然也. 無其氣, 則理何從掛搭而成造化乎? 太極不過陰陽之理, 非陰陽之外別有箇理耳. 只是陰陽之自然如此之謂理也, 其理之至極無可之謂太極也.” (任允摯堂, <理氣心性說>, <<允摯堂遺稿>> 上篇, 26a - 26b)


28) “若令理氣原有先後之可言, 則動靜陰陽不翅爲有端有始, 而器與道決是自二合一之物, 程子之言何以如此, 而朱子又何以謂‘本混融而無間’耶? 其不可執言而迷之也明矣.” (같은 글, 같은 책 28a)


29) 羅欽順, <<困知記>> 下 19. <<理學叢書>>, 北京 中華書局, 1990, p 29


30) 같은 책 下 29. p 30


31) 같은 책 上 11. p 5


32) 任聖周, <鹿廬雜識>, <<鹿門集>> 권19 雜著, 3b / 10a


33) “夫性也者, 心之所具之理, 心也者, 性之所寓之器, 二而一者也. 故其虛靈神明變化不測者心也, 而所以能虛靈神明變化不測者理也. 理無爲而心有爲, 理無迹而心有迹; 非理無所發, 非心不能發. 安有以理氣之混融者, 而有性獨發心獨發之理乎哉?” (任允摯堂, <人心道心四端七情說>, <<允摯堂遺稿>> 上篇, 39b - 40a)


34) 任聖周, <鹿廬雜識> <<鹿門集>> 권19 雜著, 6a - 6b, 8b - 10b, 18b - 30b / <答金伯高> 같은 책, 권6 書, 2a - 3a


35) “夫所謂心者, 湛一之神明也; 湛一之神明者, 則天地生物之心也. 人物之生於兩間者, 同得此生物之心以爲心, 則其心所具之理宜無不同. 而只是禽獸得氣之偏且塞, 而其心橫, 其窒無以全其天地之心. 故雖因血氣而略有知覺, 而所具之性, 自不得不隨而偏暗. ..... 至若人之心則其得天地生物之心, 雖曰與萬物一體, 而唯其正通之稟, 與偏塞之氣, 判而爲人物之大界.” (任允摯堂, <人心道心四端七情說>, <<允摯堂遺稿>> 上篇 說 32a - 33b)


36) 오늘날의 황해도 송화군


37) 중종(中宗) 원비(元妃)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능. 경기도 일산 소재.


38) 오늘날의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39) 任聖周, <答舍弟穉共>, <<鹿門集>> 권10 書, 22b


40) 任靖周, <宿預錄>, <<雲湖集>> 권3 雜著, 32b - 33a


41) 같은 책 권3, 6b - 7a


42) 같은 책, 12b


43) 같은 책 권3, 36b - 37a / 권4, 12b - 13a


44) 任靖周, <論妓弊>, <<雲湖集>> 권4 雜著, 40b


45) 張志淵, <吳熙常外諸公>, <<朝鮮儒敎淵源>> 41節


46) “夫所謂生物之心者, 卽二氣之良能, 湛一之神明也. 則無論天人, 只此一箇神靈, 明活化妙, 衆宰萬里; 而無此, 則無以爲一元氣; 而無此, 則無以成萬殊. 立於有形之前, 以能爲氣母; 具於有形之後, 以不爲氣囿. 不以在天而有餘, 不以在人而不足. 朱子所言氣之精爽, 卽指此元初良能, 自正幹直下來, 靈明活化, 天人無別處, 極本窮源而言, 非形以後竝指其氣質渣滓而論也.” (任靖周, <與金領府-論韓南塘心說>, <<雲湖集>> 권1 書, 12b)


47) “(浦中諸公), 只知性善爲主可以矯揉氣質, 而不知心若本惡則性何以獨善. 藉曰獨善, 而理本無爲, 則孰主張是而矯揉可施也? [此亦只是氣質混濁之中, 湛一神明初未嘗息, 故能知善之當爲ㆍ惡之當去, 而濁駁可變爲淸粹, 愚不肖可變爲賢智耳.]” (같은 글, 16a - 16b)


48) “夫吾儒之言心善也, 以本心至淸無汚, 故能該本性之純善無惡, 而未發則寂寂惺惺爲天下之大本, 已發則正正方方爲萬事之綱紀, 天下雖大, 吾心之體無不該, 事萬物雖衆, 吾心之用無不貫.” (같은 글,  20a - 20b)


49) 程頤, <<程氏遺書>> 권15 伊川先生語1


50) 任聖周, <存存龕記>, <<鹿門集>> 권20 記, 50b - 51b


51) 任聖周, <主一銘>, <<鹿門集>> 권 22 銘, 4b


52) “如君義臣忠, 義與忠本體也, 能義能忠工夫也. 又如父慈子孝, 慈與孝本體也, 能慈能孝工夫也. 推之萬事, 莫不皆然. 此與好徑欲速, 指義自別矣. 元來本體工夫, 旦有能所之別已, 本非二事. 大德也有本體工夫, 小德也有本體工夫, 深琓之可見. 愚則未知其爲病, 未知如何.” (任靖周, <答宋靜深>, <<雲湖集>> 권2 書, 2a - 2b)


53) 任靖周, <與宋靜深>, <<雲湖集>> 권2 書, 3a - 4b / 任聖周, <答舍弟穉共>, <<鹿門集>> 권10 書, 22a - 22b 등 참조. 운호가 고반룡(高攀龍)의 사상에 대해 개방적인 자세를 취한 것, 젊은 시절 왕수인(王守仁)․진헌장(陳獻章)의 사상에 대해 호감을 가졌던 것 등을 확인할 수 있다.


54) 任靖周, <未發說>, <<雲湖集>> 권5 雜著, 1a-4a


55) 여기서 독자적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 양명학(陽明學)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일 없이 자체적으로 발전적인 이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와 같은 경향성을 갖게 되었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